불명예 그리고 전쟁 뮌헨협정을 알아보자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뮌헨협정이라고 했다.
을사조약을 두고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것처럼
뮌헨협정을 두고 체코는 뮌헨늑약 또는 뮌헨의 배신이라고 하는데
이 조약은 무엇이었고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자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둘다 선택했다.
윈스턴 처칠
때는 1938년이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지 어느덧 20이 지났지만, 1929년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끝날줄 몰랐으며 아직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의 상처로 허덕이는데 경제위기 까지 닥쳐 왔다.
독일 같은 경우는 상황이 많이 좋지 못했다. 1차세계대전이후 전쟁배상금을 지불 했어야 했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에서 빌린 채권을 독일에다가 받아낼 생각이었고 영국은 당시 금액 기준으로 46억달러, 프랑스는 40억달러에 육박하였고 유럽 전체가 미국에 진 채무는 100억 달러였다.
1921년 5월 1일 배상 위원회는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갚을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독일은 당연히 갚을 능력이 없었다.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벌어들이는 조세보다 많은 화폐를 찍어냈고 모두들 아는것처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과 더불어 배상금의 요구에 불만이 하늘로 찔렀으며, 이 조약을 수락한 신생 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도 분노를 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이때 떠오른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과정은 다음에 알아보도록 하고 다시 베르사유 조약으로 돌아가보자
민족자결주의와 베르사유 조약을 기반으로 신생국이 탄생했는데, 이는 체코슬로바이카이다.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로 역사상 처음으로 가져본 독립 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더해 독립국을 만들었는데, 이렇게만 보면 당연한 일이자 다행이다.
하지만 한번도 존재한적이 없었기에 국경문제가 생겨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졸지에 체코인+슬로바키아인이라는 다민족 국가가 되는데, 천년동안 다른 역사를 지닌 사실상 다른 민족이다.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논리로 아돌프 히틀러의 국민투표 결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되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으로 나누어진 게르만인은 하나의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했으며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
1.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병합됨 (1938년 10월)
2. 체코 톄신이 폴란드에 병합됨 (1938년 10월 2일).
3.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경 지역을 헝가리에 병합 (1938년 11월 2일)
4. 카르파티아 산맥의 루테니아인 거주 지역이 헝가리로 흡수됨 (1939년 3월).
5. 1939년 3월 체코의 나머지 영토는 독일의 보호국이 되어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국이 됨
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존속.
히틀러는 독일인의 생활공간을 요구하였는데, 체코슬로바키아의 게르만 다수 거주 지역인 주데테란트 할양을 요구하였다.
맨처음 설명했던것 처럼 유럽은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차세계대전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대공황도 있었던 터라 군비증강 만큼은 원하지도 않았고, 전쟁을 이미 맛보았기에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프랑스와 영국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독일의 조건을 수용을 해주게 되는데 이를 뮌헨협정이라고한다.
그리고 정작 땅이 조각나는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협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도 못한다.
*국제 연맹은 회원국이 비회원국에게 나라를 팔아먹고 있는데도 방관하고 있었다. 사실상 식물기관이었지만
한마디로 남의 나라들이 멋대로 결정을 해서 영토를 때어주는 일이 발생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로써 국가방위능력을 상실하고 전체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명의 인구를 잃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국내법적으로도 위헌이었다.
하지만 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축제였다.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지 않던 대중과 언론 사이에 “평화의 수호자”라고 칭송받았다.
회담 다음날인 1938년 9월 30일, 영국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런던 시민들 앞에서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를 지켜냈다고 연설한다.
한 남자가 우리를 최대의 전쟁으로 부터 구하다!
1938년 8월 30일, 영국 네빌체임벌린의 연설 소개 문구
그리고 6개월뒤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병합하면서 협정을 파기하였으나
영국은 외교항의만 할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그리고 6개월뒤 폴란를 침공하며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른다.
1년짜리 평화였던 것이다.
사실 히틀러는 협정을 체결할때도 평화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으며, 일부로 전쟁을 할생각이 었기 때문에 조건을 강경하게 내걸었는데,
문제는 프랑스랑 영국이 무조건적으로 합의를 해준것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명분을 잃어서 전쟁을 6개월 늦춘 계기가 되기도 하다.
“군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1년 일찍 전쟁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에서 우리의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Sebastian Haffner: Anmerkungen zu Hitler. 26. Auflage, Fischer Taschenbuch Verlag, Frankfurt am Main 2006 [zuerst München 1978], S. 51.
이 것을 통해서 싸울 의지가 없는 유화정책은 적을 오히려 강경하게 만든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처음부터 적의 도발 또는 전쟁의지를 분쇄 시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억지력이라는 이론이 정립 되었고
이는 냉전시절 끝없는 군비경쟁에 들어가게 되는 이론이 되기도 한다.
덤으로 말하면 영국이 뮌헨협정을 체결하고 환호를 할때 단 한사람, 그것도 무명의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독일과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전쟁에 미쳤다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그 말이 사실이 되면서 체임벌린 총리는 사임을 하고 후임으로 1년전부터 유일하게 전쟁을 경고하던 무명의 정치인이 한순간에 영국 총리가 되는데
이 사람이 처칠이다.